래리 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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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래리 도비는 1947년 재키 로빈슨에 이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 흑인 선수이자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로,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야구 선수이다. 그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주로 중견수로 활약하며 1948년 월드 시리즈에서 흑인 선수 최초로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7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1952년과 1954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을 차지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감독 및 임원 경력을 거쳤으며, 199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도비는 2003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은 인종 평등과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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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도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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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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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중견수 / 감독 |
타석 | 좌타 |
투구 | 우투 |
출생일 | 1923년 12월 13일 |
출생지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캠던 |
사망일 | 2003년 6월 18일 |
사망지 | 미국 뉴저지주 몽클레어 |
선수 경력 | |
니그로 리그 데뷔 | 리그: NgL 날짜: 년도: 1942년 팀: 뉴어크 이글스 |
MLB 데뷔 | 리그: MLB 날짜: 1947년 7월 5일 년도: 1947년 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NPB 데뷔 | 리그: NPB 날짜: 1962년 6월 30일 년도: 1962년 팀: 주니치 드래건스 |
MLB 최종 | 리그: MLB 날짜: 1959년 6월 26일 년도: 1959년 팀: 시카고 화이트삭스 |
NPB 최종 | 리그: NPB 날짜: 1962년 10월 9일 년도: 1962년 팀: 주니치 드래건스 |
소속 팀 | 니그로 리그: 뉴어크 이글스 (1942–1944, 1946–1947)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7–1955) 시카고 화이트삭스 (1956–195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58)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59) 시카고 화이트삭스 (1959) 일본 프로 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1962) |
감독 경력 |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8) |
기록 (MLB) | |
타율 | 0.288 |
홈런 | 273 |
타점 | 1,099 |
감독 기록 | 37승 50패 |
승률 | 0.425 |
기록 (NPB) | |
타율 | 0.224 |
홈런 | 10 |
타점 | 35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니그로 리그) | NgL 올스타 (1946) |
올스타 (MLB) | 7회 올스타 (1949–1955) |
니그로 월드 시리즈 | 니그로 월드 시리즈 우승 (1946) |
월드 시리즈 | 월드 시리즈 우승 (1948) |
AL 홈런왕 | 2회 AL 홈런 리더 (1952, 1954) |
AL 타점왕 | AL 타점 리더 (1954) |
영구 결번 |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No. 14 |
명예의 전당 |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국립 야구) | 선출: 1998년 방법: 베테랑 위원회 |
2. 어린 시절
래리 도비는 1923년 12월 13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캠던에서 데이비드 도비와 에타 브룩스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고, 말 관리인이자 세미프로 야구 선수였다. 하지만 래리가 어릴 때 가족을 떠났고, 이후 뉴욕주에서 사고로 사망했다.[1]뉴저지주 패터슨으로 이주했고, 래리는 캠던에 남아 1934년부터 1938년까지 할머니와 함께, 그 후에는 고모 부부와 함께 살았다.[1]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법에 따라 인종적으로 분리된 잭슨 학교에 다녔다. 그가 처음으로 조직적인 야구를 접한 것은 감리교회와 관련된 사립 학교인 보일란-헤이븐-마더 아카데미에서였다. 아버지의 옛 매니저였던 리처드 듀보스로부터 야구 지도를 받기도 했다.[1] 훗날 도비는 당시 낡은 빗자루 자루를 배트로 사용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어려운 환경에서 야구를 했음을 이야기했다.[3]
니그로 리그 심판이었던 헨리 무어의 조언에 따라, 뉴어크 이글스의 구단주 에이브와 에파 매놀리는 패터슨의 힌클리프 스타디움에서 도비의 입단 테스트를 진행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도비는 1942년, 17세의 나이로 이글스에 입단하여 300USD를 받았다.[1] 계약 조건에 따라 그는 대학 수업이 시작되는 9월까지만 경기에 출전하기로 했으며, 아마추어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래리 워커"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지역 기자들에게는 그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출신이라고 소개되었다.[1] 5월 31일, 도비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쿠반스와의 경기에 출전하며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4][7] 기록이 남아있는 26경기에서 그의 타율은 .391이었다.[1] 도비는 캐처 조시 깁슨과 투수 레이 브라운이 있던 홈스테드 그레이스와의 경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46년 니그로 리그의 뉴어크 이글스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래리 도비는 1947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 빌 비크에 의해 발탁되었다. 1947년 7월 5일, 도비는 재키 로빈슨에 이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 흑인 선수이자,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최초의 흑인 선수로 데뷔했다.[16][17]
8학년을 마친 14세 때, 도비는 어머니와 다시 함께 살기 위해 북쪽의 패터슨으로 이사했다.[1][4] 패터슨 이스트사이드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여러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야구와 농구는 물론, 미식축구에서는 와이드 리시버로 활약했고 육상에서도 레터맨으로 선정되어 총 11개의 대학 대표 선수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당시 만연했던 인종 차별의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미식축구팀의 유일한 흑인 선수였던 도비는 팀이 주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경기에 초청받았으나, 주최 측이 그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팀 동료들은 도비를 지지하며 경기 참가를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5]
고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에는 '스마츠 세츠'라는 흑인 세미프로 야구팀에서 뛰었는데, 이곳에서 훗날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유격수 몬테 어빈과 함께 활동했다.[1] 또한, 프로 농구팀 하렘 르네상스에서 잠시 무급 선수로 뛰기도 했다.[4]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롱아일랜드 대학교 브루클린(LIU)으로부터 농구 스포츠 장학금 제의를 받아 진학을 결정했다. 그가 LIU를 선택한 주된 이유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사귀던 헬린 커비가 있는 패터슨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1]
LIU에 입학하기 전인 1942년 여름, 도비는 흑인 전국 리그(NNL)의 뉴어크 이글스로부터 시즌 잔여 기간 동안 뛰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1][7] 이로 인해 대학은 버지니아 연합 대학교로 옮기게 되었다.[8] 뉴어크 이글스의 구단주 에이브와 에파 매놀리는 패터슨의 힌클리프 스타디움에서 도비의 입단 테스트를 진행했고, 17세의 도비는 300USD의 계약금을 받고 이글스에 합류했다.[1] 당시 대학 선수로서 아마추어 자격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래리 워커"라는 가명을 사용했다.[1] 1942년 5월 31일, 도비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쿠반스와의 경기를 통해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4][7] 기록이 남아있는 26경기에서 그의 타율은 .391에 달했다.[1] 도비는 캐처 조시 깁슨과 레이 브라운이 있던 홈스테드 그레이스와의 경기를 회상하며, 깁슨이 타석에 들어선 자신에게 직구, 커브 등을 예고하고 던지게 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9]
3. 니그로 리그와 제2차 세계 대전
> 첫 타석에서 조시는 '네가 직구를 칠 수 있는지 보자'고 말했다. 나는 1루타를 쳤다. 다음 타석에서 조시는 '네가 커브를 칠 수 있는지 보자'고 말했다. 나는 1루타를 쳤다. 세 번째 타석에서 조시는 '네가 쓰러진 후 어떻게 하는지 보자'고 말했다. 그들이 나를 쓰러뜨린 후 첫 번째 타석에서 나는 팝아웃을 기록했다. 두 번째 타석에서 나는 1루타를 쳤다.[9]
도비의 뉴어크 이글스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 복무로 인해 2년간 중단되었다. 그는 1943년부터 1944년 일부 기간 동안 시카고 인근의 그레이트 레이크스 해군 훈련 학교 내 캠프 로버트 스몰스에서 복무했다.[10] 이곳에서 그는 흑인 선수들로 구성된 야구팀 소속으로 뛰며, 일부 메이저 리그 선수들이 포함된 백인 선수 팀들을 상대로 .342의 타율을 기록했다.[11] 이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만의 트레저 아일랜드 해군 기지로 배치되었다. 태평양 전쟁 참전 전에 유타주 오그덴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해군 시설에서도 복무했으며, 1945년에는 태평양의 울리티에 주둔했다. 도비는 울리티 기지에서 무선을 통해 재키 로빈슨이 인터내셔널 리그의 몬트리올 로열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메이저 리그 선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4] 하와이 복무 중에는 해군 동료이자 훗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팀 동료가 되는 미키 버논을 만났다.[12] 당시 워싱턴 세너터스 소속이었던 버논은 도비의 실력에 감명받아, 메이저 리그가 인종 통합을 허용할 경우 그를 영입하라고 구단주 클라크 그리피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13] 해군 복무 중 도비는 동료들 사이에서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졌다.[10]
도비는 1946년 1월 해군에서 제대했다.[4] 그해 여름, 그는 헬린 커비와 결혼했다.[1] 푸에르토리코의 산 후안 세너터스에서 잠시 뛴 후, 1946년 뉴어크 이글스에 복귀했다.[14] 그는 그해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360의 타율(NNL 4위), 5개의 홈런(5위)을 기록했으며, NNL에서 3루타(6개)로 1위를 차지했다. 비즈 매키 감독이 이끄는 이글스는 도비, 몬테 어빈, 조니 데이비스 등의 활약에 힘입어, 1946년 니그로 리그 월드 시리즈 7경기에서 새철 페이지가 이끄는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시리즈에서 도비는 .372의 타율에 1개의 홈런, 5타점, 3개의 도루를 기록했다.[4] 니그로 리그의 많은 사람들은 로빈슨이 아니라 도비 또는 어빈이 MLB의 인종 장벽을 먼저 깰 것이라고 믿었다. 도비는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로서의 경력을 고려하면서 "나는 그렇게 멀리 생각한 적이 없었다. 분리된 사회에서 자라면서, 그것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46년에 로빈슨 씨가 몬트리올에서 뛸 기회를 얻기 전까지 야구에서 밝은 면을 볼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15]
1942년부터 1944년, 그리고 1946년부터 1947년 시즌 도중까지 니그로 리그의 뉴어크 이글스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4. 메이저 리그 경력
데뷔 초, 도비는 극심한 인종 차별에 직면했지만[20][21][22], 이를 극복하고 팀의 주전 중견수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1948년에는 타율 .301, 14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10] 특히 월드 시리즈 4차전에서는 흑인 선수 최초로 홈런을 기록했으며[15], 이후 백인 투수 스티브 그로멕과 포옹하는 사진은 인종 화합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았다.[119][33]
도비는 이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1949년부터 1955년까지 7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다.[36] 그는 뛰어난 장타력을 바탕으로 1952년과 1954년 두 차례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에 올랐으며, 1954년에는 타점왕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53][60] 1954년에는 팀을 아메리칸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월드 시리즈에서는 뉴욕 자이언츠에 패했다.[61]
1955년 시즌 후, 도비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64][65] 화이트삭스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이어갔으나, 이후 볼티모어 오리올스, 다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그리고 다시 화이트삭스를 거치며 선수 생활 말년을 보냈다.[73][74][25][76][77] 1959년 퍼시픽 코스트 리그에서 뛰던 중 발목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고, 이 부상으로 인해 메이저 리그 선수 경력을 마감하게 되었다.[81][82]
현역 은퇴 후인 1962년, 도비는 전 다저스 스타 돈 뉴컴과 함께 일본 프로 야구의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일본 야구를 경험한 최초의 전직 메이저리거 중 한 명이 되었다. 비록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났지만, 그의 일본 진출은 큰 화제를 모았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몬트리올 엑스포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등에서 코치 생활을 했으며, 1978년에는 화이트삭스의 감독 대행을 맡아 프랭크 로빈슨에 이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 흑인 감독이 되었다.[13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영구 결번으로 1994년 지정.
1994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그의 공로를 기려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1998년에는 베테랑스 위원회의 투표를 통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경험자로는 최초의 명예의 전당 입성이었다.
도비는 2003년 6월 18일, 암 투병 끝에 뉴저지주 몬트클레어 자택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종 차별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서 야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선수이자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4. 1. 인종 차별 극복
1947년 7월 3일, 래리 도비는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데뷔했다. 이는 재키 로빈슨이 내셔널 리그에서 인종 장벽을 깬 지 불과 약 3개월 만의 일이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 빌 비크는 도비에게 재키 로빈슨의 경우처럼 인종차별적 모욕에 절대 반응하지 말고, 심판에게 항의하거나 팬들에게 대응하지 말라는 특별한 행동 규칙을 지시했다.
도비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데뷔와 동시에 극심한 인종 차별과 편견에 직면해야 했다. 팀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일부 동료 선수들은 그와 악수하기를 거부했으며, 경기 전 워밍업 시간에는 조 고든이 같이 연습해 주기 전까지 5분간 홀로 서 있어야 했다. 원정 경기 시 호텔에서는 팀 동료들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이 거부되었고, 식당에서는 서비스를 받지 못했으며, 남부에서의 봄 훈련 중에는 구장 출입을 제지당하기도 했다. 팀 내 다른 흑인 선수가 없어 원정길에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외로움도 견뎌야 했다.
재키 로빈슨이 먼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인종 장벽을 넘었지만, 이것이 도비의 길을 쉽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105] 도비는 훗날 인터뷰에서 "재키는 인종 차별을 견뎌낸 것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나 역시 똑같은 일을 겪어야 했다. 그가 먼저였을 뿐, 내가 겪은 고통도 그만큼 심했다. 아무도 '두 번째 흑인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자'고 말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105] 언론과 대중이 재키 로빈슨에게 집중하는 동안, 아메리칸 리그에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으며 길을 개척한 도비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22][28][104] ''뉴욕 타임스''는 "첫 번째를 숭배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는 종종 잊혀진다"고 지적했으며,[22]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1997년 로빈슨의 등번호 영구 결번 당시 도비가 언론의 무관심 속에 있었다고 비판했다.[28]
경기 중에도 모욕은 계속되었다. 2루로 슬라이딩할 때 상대 팀 유격수에게 침 뱉음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는데, 도비는 이를 선수 생활 중 겪은 최악의 부당함으로 꼽았다.[108][23] 경기장 안팎에서 끊임없는 인종차별적 비방[109]과 살해 위협[110]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도비는 짐 크로 법이 시행되던 워싱턴 D.C.나 세인트루이스 같은 도시에서 경기를 할 때, 자신을 향한 야유를 오히려 동기 부여로 삼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곳들은 주요 짐 크로 좌석 야구장이었고, 타석에 들어서면 누가 나를 욕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20]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도비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인종 차별에 맞섰다. 특히 1948년 월드 시리즈 4차전에서 도비가 결승 홈런을 쳐 백인 투수 스티브 그로멕 (Steve Gromek영어)이 승리 투수가 되자, 라커룸에서 사진 기자의 요청으로 둘이 포옹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 사진은 당시 만연했던 인종 갈등 속에서 인종 화합의 상징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었다.[135]
동료 선수였던 조 모건은 도비가 로빈슨을 존경했으며 결코 질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고,[106] 알 로젠은 도비가 로빈슨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였을 수 있으며, 그가 받아야 할 인정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07] 도비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후배 흑인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야구계의 인종 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1997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서는 로빈슨과 도비의 메이저 리그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시구를 하기도 했다.[112]
4. 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7-1955, 1958)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 빌 베크는 1942년부터 야구계의 인종 장벽 철폐를 주장했으나, 당시 커미셔너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에 의해 거부되었다.[1] 베크는 니그로 리그에서 재능 있는 젊은 흑인 선수를 찾기 시작했고,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가 겪게 될 압박과 조롱을 견딜 만한 선수를 찾는다면 인디언스에 영입하겠다고 밝혔다. 한 기자는 베크가 그레이트 레이크스 해군 훈련 학교 시절 본 도비를 추천했으며, 다른 흑인 리그 담당 기자들도 도비의 이름을 언급했다.[11] 인디언스 스카우트 빌 킬리퍼는 도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경기 외적인 문제도 없다고 보고했다.[28] 브루클린 다저스의 브랜치 리키가 재키 로빈슨을 내셔널 리그로 데려오기 위해 정식 계약했던 것과 달리, 베크는 도비를 뉴어크 이글스에 남겨두면서 영입을 준비했다.[11]
베크는 뉴어크 이글스 구단주 에파 맨리에게 도비의 계약 구매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1만달러를 지불했고, 도비가 인디언스에 30일 이상 남게 되면 추가로 5천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총액은 1.5만달러였다.[17] 맨리는 베크에게 "래리 도비가 백인이었다면 보너스로 10만달러를 주고 계약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6] 베크는 도비와의 계약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했다.[11] 7월 4일 더블헤더 경기 후, 베크는 도비를 시카고로 이동시켰고, 인디언스는 다음 날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11]
1947년 7월 5일, 도비는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MLB 데뷔전을 치렀다. 이로써 그는 재키 로빈슨에 이어 MLB 역사상 두 번째 흑인 선수가 되었으며,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최초였다. 베크는 도비의 안전을 위해 사복 경찰 두 명을 고용했다.[18] 선수 겸 감독이었던 루 부드로는 주로 2루수와 유격수로 뛰었던 도비를 라인업에 포함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9] 도비가 처음 팀 동료들과 만났을 때, 악수를 청했지만 대부분 외면하거나 마지못해 응했다.[20][21] 팀 동료 중 4명은 악수를 거부했고, 2명은 등을 돌렸다.[22] 워밍업 중에도 동료들은 그를 외면했지만, 2루수 조 고든이 캐치볼을 제안하며 다가왔고, 이후 고든은 도비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되었다.[23]
도비는 7회 대타로 출전하여 삼진을 당했다. 경기 후 그는 클럽하우스에서 빠르게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팀 동료들이 묵는 호텔이 아닌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의 흑인 호텔에 머물러야 했다. 이러한 분리된 숙소 배정은 그의 선수 경력 내내 여러 도시에서 겪어야 할 차별의 시작이었다.[1] 7월 6일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에서는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원래 2루수였던 도비는 1루수 미트가 없었고, 팀 동료 에디 로빈슨은 미트 빌려주기를 거부했다.[5] 결국 조 고든의 도움으로 화이트삭스 선수에게 미트를 빌려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22][5] 이 경기에서 도비는 4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MLB 첫 안타와 타점을 올렸다.[25]
클리블랜드 지역 언론은 도비 영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26], 전설적인 선수 로저스 혼스비는 "도비는 메이저 리그에서 뛸 자격이 없다"며 혹평하기도 했다.[27] 도비는 루키 시즌 29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156 (32타수 5안타)를 기록했다.[24] 시즌 내내 그는 재키 로빈슨과 전화 통화를 하며 서로 격려했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로 다짐했다.[28][29][30] 시즌 후, 도비는 1948년 1월 아메리칸 농구 리그의 패터슨 크레센츠와 계약하여 잠시 농구 선수로 활동했는데, 이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이기도 했다.[1][8][18]
1948년, 도비는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첫 스프링 트레이닝을 경험했다. 그는 백인 동료들과 달리 호텔에 머물지 못하고 현지 흑인 가정집에 머물며 구단이 제공한 렌터카로 이동해야 했다.[10]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전설적인 외야수 트리스 스피커와 행크 그린버그로부터 외야 수비 지도를 받았고, 코치 빌 맥케치니의 도움으로 메이저 리그에 적응해 나갔다.[10][22] 휴스턴에서 열린 뉴욕 자이언츠와의 시범 경기에서는 약 약 152.40m짜리 대형 홈런을 치며[32] 1948년 시즌 클리블랜드 로스터 합류를 확정지었다.[32] 그해 도비는 12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01, 14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 잡았다.[10] 시즌 내내 상대 팀으로부터 인종차별적 언행을 겪자, 빌 베크 구단주는 아메리칸 리그 회장 윌 해리지에게 선수들의 적대 행위를 제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10]
도비는 1948년 월드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꺾고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월 9일 열린 4차전에서는 월드 시리즈 역사상 흑인 선수 최초의 홈런을 기록했다.[15] 이 경기에서 완투승을 거둔 백인 투수 스티브 그로멕과 도비가 라커룸에서 포옹하는 사진은 다음 날 ''Plain Dealer'' 1면에 실렸고, 야구 인종 통합의 상징적인 순간으로 평가받는다.[119][33] 도비는 이 사진에 대해 "홈런을 친 것보다 더 기뻤다. 마침내 동료가 나에 대한 감정을 보여준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34] 인디언스는 6차전 만에 브레이브스를 꺾고 1920년 이후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도비는 시리즈에서 팀 내 최고 타율인 .318을 기록했다. 유명 칼럼니스트 그랜트랜드 라이스는 도비와 투수 진 비어든이 없었다면 인디언스는 4~5위에 그쳤을 것이라고 평가했다.[35] 시리즈 후 도비는 고향 패터슨에서 환영 퍼레이드를 받았고, 오프시즌에는 동료들과 함께 영화 ''클리블랜드 출신 아이''에 출연했다.[61] 우승 상금으로 패터슨의 백인 거주 지역에 집을 사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시장의 중재 끝에 겨우 집을 구할 수 있었다.[34]
1949년 시즌, 도비는 처음으로 MLB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는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돈 뉴컴과 함께 1949년 올스타전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선수 4명 중 한 명이었다.[36] 그해 홈런(24개)과 타점(85개)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1950년에는 ''스포팅 뉴스''로부터 조 디마지오를 제치고 리그 최고의 중견수로 선정되었다.[38] 그는 142경기에서 타율 .326, 안타 164개, 출루율 (OBP) .442 등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고, 특히 출루율은 아메리칸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처음으로 100타점(102)을 넘겼으며, AL MVP 투표에서 외야수 중 가장 높은 8위에 올랐다.[40] 시즌 후 구단은 그와 더 나은 조건으로 재계약했고[41], 클리블랜드 스포츠 기자단은 그를 '올해의 클리블랜드 야구 선수'로 선정했는데, 흑인 선수로는 최초였다.[42]
1951년에는 부진을 겪으며 팀이 뉴욕 양키스에 밀려 아메리칸 리그 우승에 실패하자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구단은 그의 트레이드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2년에는 2.8만달러의 연봉을 받아 투수 밥 펠러를 제외하고 팀 내 최고 연봉 선수가 되었다.[1] 그해 도비는 32홈런과 104득점으로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과 득점 1위를 차지하며 부활했다. 1953년에도 29홈런 102타점으로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1954년 도비는 32홈런, 126타점으로 다시 한번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하며 인디언스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MVP 투표에서는 뉴욕 양키스의 요기 베라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뉴욕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 1955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성적이 하락했고(26홈런 75타점), 시즌 종료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7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1958년 시즌에 다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복귀하여 89경기에 출전, 타율 .283, 13홈런, 45타점을 기록했다.
1994년, 인디언스가 새로운 홈구장 제이콥스 필드를 개장하면서 도비가 인디언스 시절 달았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자 1947년부터 1955년까지 도비의 팀 동료였던 밥 펠러는 도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위대한 미국인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국가에 봉사했으며, 훌륭한 야구 선수였습니다. 그는 버즈 올드린과 같은 존재였는데, 달에 두 번째로 발을 디딘 사람이었죠. 그는 재키 로빈슨 다음으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두 번째 흑인 선수였으니까요. 그는 훌륭한 선수였고, 흥미진진한 선수였으며, 매우 훌륭한 팀 동료였습니다."[31]
4. 3. 시카고 화이트삭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56-1959)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9시즌을 보낸 후, 도비는 1955년 10월 25일 치코 카라스켈과 짐 버스비를 상대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시카고는 팀 홈런 116개로 시즌을 마감하여 꾸준한 홈런 타자를 찾고 있었다.[64][65] 척 코미스키 화이트삭스 부사장은 "장타 타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꾸준한 타자가 절실했고, 오랫동안 도비를 눈여겨봤습니다."라고 말했으며,[66] 마티 매리언 감독 역시 도비의 합류를 환영하며 "그는 우리가 클리블랜드와 경기할 때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우리가 잃을 수 있는 1점, 2점 차 승부에 큰 차이를 만들 것입니다."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67]
1956년, 도비는 이적 첫해부터 좋은 활약을 펼쳤다. 6월 22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더블헤더에서 승리하며 팀의 4연전 스윕에 기여했는데, 이는 양키스가 1945년 시즌 이후 처음으로 4경기 시리즈에서 스윕을 당한 사례였다.[68] 화이트삭스는 이 기간을 포함해 8연승을 달리며 아메리칸 리그(AL) 시즌 초반 최장 연승 기록을 세웠고, 도비는 이 8연승 기간 동안 6개의 홈런을 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68] 코미스키 부사장은 "도비를 영입했을 때, 우리는 래리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해낼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만족감을 표했다.[68] 도비는 1956년 시즌을 .268의 타율, 팀 내 최고인 24개의 홈런과 102타점으로 마감했다. 시카고는 85승 69패로 AL 3위를 기록했다.[69]
1957년에도 도비는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8월 20일 워싱턴 세네터스와의 경기에서는 투수 밥 키건의 노히트 노런 달성을 돕는 결정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허브 플루스의 깊은 라인 드라이브 타구를 백핸드 캐치로 잡아낸 이 플레이는 키건의 노히터 과정에서 나온 두 번의 큰 위기 중 하나였다.[70][71] 그는 1957년 시즌에 .288의 타율, 79타점을 기록했고, 14개의 홈런은 팀 내 공동 1위에 해당했다. 화이트삭스는 90승 64패로 AL 2위를 차지했다.[72]
시즌 종료 후인 1957년 12월 3일, 도비는 화이트삭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 간의 다자간 트레이드에 포함되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오리올스 소속으로 정규 시즌 경기를 치르기 전인 1958년 4월 1일, 돈 페라레세와 함께 진 우들링, 버드 데일리, 딕 윌리엄스를 상대로 친정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73][74] 그는 1958년 인디언스에서 89경기에 출전하여 .289의 타율, 13개의 홈런, 45타점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1959년 3월 21일, 도비는 티토 프란코나를 상대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다.[25] 릭 페렐 타이거스 단장은 "이 트레이드로 우리 팀은 더 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도비가 브리그스 스타디움에서 예년처럼 좋은 타격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75] 하지만 도비는 타이거스에서 18경기에 출전하여 .218의 타율과 4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결국 5월 13일 타이거스는 35세의 도비를 2만달러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다시 매각했다.[76][77]
화이트삭스로 복귀한 도비는 21경기에 출전하여 홈런 없이 .241의 타율과 9타점을 기록한 후,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트리플 A 팀인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보내졌다.[78][79][80] 얼마 지나지 않아 새크라멘토 솔론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3루타를 친 후 슬라이딩하는 과정에서 발목 골절상을 입었다.[81][82] 이 부상은 사실상 그의 메이저 리그 선수 경력을 마감하게 만들었다. 1960년 시즌 전 화이트삭스와 함께 훈련했지만, 부상 여파로 로스터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고,[83] 4월 말 인터내셔널 리그의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에 잠시 합류했으나, X-레이 검사 결과 부상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나 5월 6일 방출되었다.[84][85] 이로써 도비의 메이저 리그 선수 생활은 1959년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5. 일본 프로 야구 경력 (1962)
1959년 MLB에서 은퇴한 후 주류 소매업자로 일하던 도비는 1962년 은퇴를 번복하고 일본 프로 야구 무대에 도전했다. 그는 니그로 리그 시절 뉴어크 이글스에서 함께 뛰었던 돈 뉴컴과 함께 주니치 드래곤스와 계약을 맺었다.[80][87][88] 이로써 도비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한 최초의 전직 메이저 리그 선수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 야구계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3년 만의 현역 복귀였지만, 나이로 인한 기량 저하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도비는 주로 1루수(36경기)와 우익수(34경기)로 경기에 나섰다.[89] 시즌 기록은 240타수에서 타율 .225, 10홈런, 35타점, 27득점이었다.[89]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NPB 첫 출장 및 선발 출장: 1962년 6월 3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2차전(주니치 구장)에서 3번 타자 겸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여 3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 NPB 첫 홈런: 1962년 7월 8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7차전(주니치 구장) 4회 말에 상대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로부터 솔로 홈런을 쳤다.
도비는 한 시즌을 마친 후 1962년 10월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주류 소매업에 종사했다.[30][90] 비록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은 짧았지만, 이 경력은 훗날 그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98년 베테랑스 위원회의 선정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선수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인물로는 최초였다. 2022년 기준으로 일본 프로 야구 선수 경력이 있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는 도비와 리치 고세지 두 명뿐이다.
6. 감독 및 임원 경력
선수 은퇴 후, 도비는 지도자와 행정가로서 경력을 이어갔다. 1969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스카우트로 시작하여 1970년에는 마이너 리그 코치를 맡았다.[79] 이후 1971년부터 1973년까지, 그리고 1976년에 진 모치 감독 아래에서 엑스포스의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61] 또한 베네수엘라 윈터 리그에서 5시즌 동안 여러 팀을 감독했으며, 특히 1970–71년 시즌에는 아길라스 델 줄리아를 이끌었다.[2][91][92]
도비는 메이저 리그 감독직을 희망했으나, 1970년대 당시 야구계는 흑인 감독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인 분위기였다. 1974년 시즌, 켄 아스프로몬테 감독 아래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1루 코치로 합류하며 감독직에 대한 기대를 가졌지만, 시즌 후 아스프로몬테가 해고되자 인디언스는 프랭크 로빈슨을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했다. 로빈슨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었고, 도비는 다시 엑스포스로 돌아가야 했다.[61][93] 엑스포스에서도 감독직 기회를 얻지 못하자 야구계를 떠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1977년, 도비의 오랜 지지자였던 빌 비크가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인수하면서 그를 타격 코치로 영입했다. 도비의 지도 아래 화이트삭스는 타격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다. 1976년 팀 타율 .255, 586득점, 73홈런에서[94], 1977년에는 팀 타율 4위(.278), 192홈런, 844득점을 기록했다.[95] 1978년 시즌 초반 팀 성적이 부진하자, 비크는 6월 30일 당시 감독이자 도비의 전 팀 동료였던 밥 레몬을 해고하고 도비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도비는 프랭크 로빈슨에 이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 흑인 감독이 되었다.[96][97][62] 비크는 도비가 팀 분위기를 바꾸고 코미스키 파크에 더 많은 흑인 팬들을 끌어들이기를 기대했다.
도비가 감독직을 맡았을 때 화이트삭스의 성적은 34승 40패였다. 그는 남은 시즌 동안 37승 50패를 기록하며 팀은 최종 71승 90패로 시즌을 마쳤다.[99] 그러나 비크는 도비와 재계약하지 않고 선수 겸 감독으로 돈 케싱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100] 비크는 도비를 다시 타격 코치로 기용하려 했으나[101], 도비는 1979년 10월 화이트삭스를 떠났다.[102]
야구계를 떠난 후, 도비는 1980년부터 1989년까지 NBA의 뉴저지 네츠에서 커뮤니케이션 담당 이사로 일했으며, 1990년까지는 지역 사회 담당 이사직도 겸임했다.[4][103] 이후 다시 야구계로 돌아와 1995년 4월 17일, 아메리칸 리그 회장 진 부디그의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야구 행정에 기여했다.[22]
'''감독 성적'''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 승 | 패 | 승률 | 최종 순위 | 승 | 패 | 승률 | 결과 | ||
시카고 화이트삭스 | 1978년 | 87 | 37 | 50 | .425 | 아메리카 리그 서부 5위 | – | – | – | – |
합계 | 87 | 37 | 50 | .425 | 0 | 0 | – | – |
7. 명예의 전당 및 업적
1994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새 구장인 제이콥스 필드를 개장하면서 도비가 선수 시절 달았던 등번호 14번을 팀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1997년 도비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인종 통합에 기여한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해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올스타 경기에서는 기념 시구를 하기도 했다.
1998년 3월 3일, 베테랑스 위원회는 만 74세의 도비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선정했다.[135] 그는 동료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테드 윌리엄스로부터 전화로 이 소식을 직접 전달받았다. 도비는 "정말 엄청난 기분이다. 마치 어깨에 솜 뭉치가 올려져 있다가 이제 내려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같은 해 7월 26일, 그는 공식적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이로써 도비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최초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되었으며, 니그로 리그와 MLB 월드 시리즈를 모두 경험한 선수(새첼 페이지, 몬테 어빈, 윌리 메이스)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일본 프로 야구에서 선수로 뛴 경험이 있는 인물로는 사상 최초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기도 하다.[135]
도비의 헌액 소식에 대해 그와 함께했던 진 모치 감독은 "래리와 재키 로빈슨이 겪었던 일을 감내하려면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 둘 다 그랬다. 오늘날 야구 선수 중 누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평가하며 그가 겪었던 인종 차별의 어려움을 언급했다. 전 MLB 커미셔너 페이 빈센트 역시 "래리의 역사적 역할은 늦게 인정받았다. 컬러 라인을 처음 깬 재키 로빈슨이 주목받는 것은 당연했지만, 90년대에 이르러서야 야구계는 래리가 재키만큼이나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23]
2003년 6월 18일, 도비는 뉴저지주 몬트클레어 자택에서 암 투병 끝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1][122][135] 당시 MLB 커미셔너였던 버드 셀리그는 "재키처럼 그는 선구자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을 우아함, 품위, 그리고 굳은 의지로 견뎌냈고,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길을 열었다"고 추모했다.[124]
; MLB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8년)
8. 유산
뉴욕 타임스는 "첫 번째를 숭배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는 종종 잊혀진다... 래리 도비는 재키 로빈슨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모든 아메리칸 리그 야구장을 통합했다. 그리고 그는 품격과 영향력을 가지고 해냈다."고 평가했다.[22] 1997년 시즌,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이 야구계 전체에서 영구 결번되었을 때, 당시 생존해 있던 도비는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사설을 통해 도비 역시 로빈슨과 동일한 굴욕을 겪었지만, 언론의 관심과 지원은 훨씬 부족했다고 지적했다.[28] 스쿱 잭슨은 2007년 MLB 선수들이 로빈슨을 기리는 전통에 대해 언급하며, 미국 사회가 종종 첫 번째가 아니거나 특정 방식으로 업적을 이루지 않은 인물들을 잊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104] 도비 자신도 1978년 인터뷰에서 "재키는 (인종 차별적 비방을) 견뎌낸 것에 대한 모든 홍보를 받았다. 하지만 내가 처리해야 했던 일도 똑같았다. 그가 먼저였지만, 내가 겪은 고통도 그만큼 심했다. 아무도 '우리는 두 번째 흑인에게 친절할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105]
도비는 로빈슨의 장례식에서 운구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28] 동료 명예의 전당 헌액자 조 모건은 "래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로빈슨을 존경했고 로빈슨이 받은 관심에 대해 결코 질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했다.[106] 전 팀 동료 알 로젠은 도비가 대학 교육을 마치기 전에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고 첫 시즌에 포지션 변경까지 겪어야 했던 점을 지적하며, 브랜치 리키의 세심한 준비 아래 데뷔한 로빈슨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로젠은 "제 생각에는, 그러한 상황 때문에, 그가 재키 로빈슨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107]
도비는 메이저 리그 선수 생활 전반에 걸쳐 심각한 편견에 시달렸다. 한 번은 2루로 슬라이딩하는 도중 상대 팀 유격수에게 침 뱉음을 당하기도 했다.[108] 그는 이를 경기장에서 겪은 최악의 불의라고 회상했다.[23] 경기 중은 물론 관중석 등 여러 곳에서 인종 차별적 비방을 견뎌내야 했으며[109],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110] 은퇴 후 그는 짐 크로 좌석이 있던 워싱턴이나 세인트루이스 같은 구장에서 야유를 들었을 때, 오히려 "5,000명의 치어리더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쿼터백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하며, 자신을 응원했을 흑인 팬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20]
1948년 월드 시리즈 4차전에서는 결승 홈런을 쳤고, 백인 투수 Steve Gromek|스티브 그로멕eng이 승리 투수가 되자 라커룸에서 사진 기자의 요청으로 그와 함께 껴안는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당시 인종 갈등이 심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장면으로 기록되었다.[13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도비를 기렸다. 1966년 8월, 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4년에는 새 구장 제이콥스 필드 개장과 함께 그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1997년 클리블랜드 올스타전에서는 시구를 맡았는데, 이는 로빈슨의 인종 장벽 돌파 50주년이자 도비의 아메리칸 리그 데뷔 50주년 3일 후였다.[112] 2007년 8월 10일에는 '래리 도비의 날'을 기념하여 선수 전원이 그의 등번호 14번을 달고 경기에 나섰다. 2012년에는 프로그레시브 필드 옆 이글 애비뉴가 "래리 도비 웨이"로 명명되었고,[111] 2015년 7월 25일에는 구장 외부에 그의 실물 크기 청동 조각상이 세워졌다.
도비는 야구계 외에서도 여러 영예를 안았다. 1973년 5월 사우스캐롤라이나 명예의 전당, 2010년 뉴저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7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8년 베테랑스 위원회의 선정으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경험자로는 최초의 명예의 전당 입성이었다. 2002년 6월 1일, 뉴저지 주 패터슨 시는 이스트사이드 파크 야구장을 "래리 도비 필드"로 명명했다. 요기 베라 박물관 및 학습 센터에는 래리 도비관이 마련되어 있다. 2011년, U.S. 우정청은 도비를 테드 윌리엄스, 조 디마지오, 윌리 스타젤과 함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우표 시리즈 인물로 선정했고, 우표는 2012년 7월 21일 발행되었다. 2013년, 밥 펠러 용기상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 해군 복무 경력을 가진 명예의 전당 헌액자 37명 중 한 명으로 도비를 기렸다. 2022년, 가든 스테이트 파크웨이의 블룸필드 (뉴저지) 브룩데일 노스 서비스 지역이 래리 도비 서비스 지역으로 개명되었다. 2023년 12월 23일,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사후 의회 금메달이 수여되었다. 에이킨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미국 야구 연구 학회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지부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현역 은퇴 후 1962년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하여 일본에서 한 시즌을 뛰었으며, 이후 몬트리올 엑스포스, 인디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1978년에는 화이트삭스 감독 대행을 맡아 프랭크 로빈슨에 이어 MLB 역사상 두 번째 흑인 감독이 되었다.[135]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도비는 "나는 하늘 위의 사람을 믿었기에 결코 씁쓸해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최선을 다한다. 다른 사람이 씁쓸해하도록 놔둔다. 내가 씁쓸하다면, 그건 나만을 아프게 할 뿐이다. 나는 빌 비벡, 짐 헤이건, 조 고든 같은 좋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23]
2003년6월 18일, 암으로 인해 뉴저지 주 몬트클레어 자택에서 향년 7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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